4×4의 세계
저자: <조우리> 글/<노인경> 그림
출판사: 창비
2025 창비 좋은 어린이 책 대상 수상작
병동에서 천장의 패널을 빙고판 삼아 혼자 게임을 하던 '호'는 우연히 좋아하는 책에 메모지를 붙이며 또래 친구 '새롬이'를 사귀게 된다. 이제 서로가 없는 병원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둘만의 세계는 점점 더 넓어져 가는데. 둘의 우정은 계속될 수 있을까? 희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아름다운 성장 이야기.
BY 2025.3.25 김현주 PD
다들 잠든 시간에 머리맡 등을 켜고 책을 읽으면 나만의 동굴에 들어온 것 같다. 할아버지가 코 고는 소리도 배경 음악처럼 느껴진다. 책 속의 쪼그만 인간들은 내게 말을 건다. 뭔가를 물어보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비밀을 나누기도 한다. 나는 걔네들이 좋아진다. 진짜 살아 있는 애들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친구가 될 수 있다.
--- p.33
강아지 그림 옆에 내 표시를 남기며 얼굴도 모르는 아이와 친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애도 언젠가 내 그림을 발견하겠지. 무료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병원이 거대한 미스터리 궁전처럼 느껴졌다. 그날부터 지나가는 모든 애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됐다. 이 중에 ‘강아지 독자’가 있는 거다.
--- pp.38-39
세로와 빙고 칸을 채우면서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기억하는 것, 가져 본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과 가 보고 싶은 곳 모두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져야 나오는 대답들이었다.
세로와 나 둘 다 가 보고 싶은 곳 맨 첫 칸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썼다. 그리고 언젠가 같이 가기로 약속도 했다.
이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 세로가 생각난다. 세로가 말해 준 세로의 단어들이 천장의 정사각형에 콕콕 박혀 있다. 그 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누워 있는 시간이 답답하고 괴로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괴롭지 않다. 세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 p.62
“그럼 이제 걷는 건 포기하는 건가요?”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야. 그렇지만 호야,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그게 뭐예요?”
“살아가는 거야. 다시 살아가는 것. 너는 그걸 해내는 중이야.”
고온유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울렁거렸다. 엄마 아빠와 할아버지는 나에게 “반드시 걸을 수 있어. 희망을 가져.”라고 자주 말하지만, 사실 요새는 고온유 선생님의 말이 더 와닿기 시작한다. 걷지 못하는 것이 완전한 절망만은 아니다. 걷지 못하더라도 다른 종류의 희망들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 p.87
네 잎 클로버는 신기하게 큰 나무 주변에 많았다. 화단 안쪽까지는 휠체어가 들어가지 못해 세로만 들어갔는데, 그 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무 아래를 들여다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세로의 노란 모자는 나비 같기도 하고 꽃잎 같기도 했다. 그 애는 머리카락이 없다며 모자를 절대 벗지 않았지만, 나는 세로의 동그란 머리통도 노란 모자만큼 귀여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 p.96
나는 휠체어라는 제약이 있고, 세로는 조금만 뛰어도 금방 지쳤기 때문에 오래 놀진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우리 둘 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족한 나와 부족한 세로가 이 세상에 둘이나 있어서. 그런 우리가 같이 있어서.
--- p.99
세로는 나를 아주 많이 웃게 했고 내 말에도 많이 웃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인 줄 몰랐다.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로와 늘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병원 생활도 꽤 할 만할 텐데.
--- p.123
집으로 돌아와 책에 붙어 있던 모든 포스트잇을 내 방 벽에 옮겨 붙였다. 두 개 벽의 반이 가득 차도록 많은 양이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그런 말들로 가득 찬, 세로와 내가 만든 우리의 세계였다. 이 세계 안에서 난 잘 살아갈 것이다. 세로와 약속한 대로 아흔아홉 명의 친구를 만들면서. 그리고 언젠가 우린 꼭 다시 만날 거다. 그땐 세로와 아주 많은 장소를 돌아다니며 어디서든 비 온 다음 날엔 지렁이 무덤을 함께 만들어 줄 거다.
바람에 팔랑이는 노란 종이들을 보며 그런 확신이 들었다. 가로는 언제나 세로랑 세트니까. 엑스(x)축과 와이(y)축이 세트인 것처럼. 바다와 육지가 세트인 것처럼. 슬픔과 기쁨이 세트인 것처럼.
롱 윈
저자: <캐스 비숍> 저/<정성재> 역
출판사: 클랩북스
우리에게 승리보다 중요한 것
승자 독식이 당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결과는 비극이다. 분노와 우울이 만연하다. 부정적 감정은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 책의 저자인 캐스 비숍는 승자 독식에 의문을 던진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서 경쟁 사회의 폐해를 지적하고 제로섬이 아닌 윈윈을 제안한다.
BY 2025.3.25 손민규 PD
승리와 성공을 이야기하다 보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경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곧잘 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획기적인 발명, 남극점 정복, 달 착륙 등 인류의 위대한 성과가 전부 경쟁 덕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이 늘 긍정적인 원동력이라고 믿으면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 「‘우리는 어쩌다 승리에 집착하게 되었나’」중에서
경쟁이라는 뜻의 competition은 라틴어 competere에서 파생된 단어다. 이 라틴어의 뜻은 ‘함께 노력하다’로, 그 바탕에는 합동이 만들어 내는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가 바뀌어 다른 사람을 무찌르고 파괴하는 모습으로 설명된다. 경쟁자를 뜻하는 competitor 역시 함께하고 협력하는 대상에서 반드시 무너뜨리고 짓밟아야 할 강력한 적으로 뜻이 바뀌었다.
--- 「‘‘루저’ 부르짖는 사회’」중에서
승리에 집착할수록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두려움이 동기가 되는 순간, 성공에 필수적인 창의성과 협동 능력, 성장하고 학습하며 적응하는 능력은 억제되고 만다. 두려움은 결국 불안을 키우는 요인이다. 스트레스는 이성적인 사고와 감정 조절을 방해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석하지도 못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지도 못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승패에 집착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마는 걸까?
--- 「‘인간은 원래 그래?’」중에서
학교 내에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시스템이 있을 때, 예를 들어 수준별로 학급을 편성해 수업하는 경우에 학생들은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한다. 소위 열등반에 배정된 아이들을 독려하려는 의도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열등반 꼬리표는 ‘패배자’라는 낙인이다. 이러한 낙인은 아이들에게 상처가 된다.
--- 「‘이 반에서 누가 제일 공부를 잘합니까?’」중에서
은퇴한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하나같이 스포츠로 가득했던 삶이 끝나자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스포츠가 곧 자신의 정체성이었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었기에, 운동을 그만두는 건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 것과도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성공은 매우 편협하게 정의되기 시작했고 그 기준 또한 단기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언론은 영웅이 된 스타 선수에게 열광할 뿐 이들이 얼마나 굴곡으로 가득한 길을 걸어왔는지, 얼마나 많은 성장통과 실패를 딛고 일어섰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 「‘메달에 울고 웃는 선수들’」중에서
단기 지표는 이와 연관된 목표가 있기 마련이다. 목표는 동기를 부여하고 성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만 자칫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만들 수 있다. 결과 그 자체만을 위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동료의 요청을 외면하고, 심하면 동료의 업무를 방해하기도 한다. 동료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야 보너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부 균열로 인해 업무 성과는 저하되고 회사는 점점 즐겁지 않은 곳이 된다. 심각해지면 부정행위와 비리가 만연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전직 사업가였던 한 수감자는 이렇게 말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뒷전이었습니다. 그저 어떻게 해야 사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에 집중했을 뿐입니다. 규정을 잘 지킨다고 보상을 받는 건 아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았으니까요.”
--- 「‘반드시 1등 기업이 되어야 한다’」중에서
누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지만 테러는 승패가 갈리는 유한한 전쟁이 아니다. 기후 변화, 사회적 불평등, 치안, 빈곤 또한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나섰지만 아직까지 ‘승리’를 거둔 적은 없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을 때도 정치인들은 어김없이 ‘승리’나 ‘바이러스 정복’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승리하겠다는 사고방식이 실제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국가 간 데이터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효과적인 공동 대응을 방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 「‘전쟁, 선거, 정치에서 승리하는 법’」중에서
목적에 초점을 맞추면 자연스레 시간에 대한 관점이 확장된다. 메달을 따거나 승진을 하거나 시험에 합격하는 등 꿈을 이루는 ‘순간’에만 빠져선 안 된다. 이런 성과들이 먼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고민해야 한다. 당신이 성공했을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당신이 만들고 싶은 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그런 다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늘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 「‘성공을 다시 정의하라’」중에서
회복 탄력성, 높은 성과, 리더십에 관한 최신 연구를 보면 공통적으로 한 가지 결론이 나타난다. 바로 배움이 중심이 되어야 변화에 적응하고 압박, 실패,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만큼,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빨리 배우고 혁신하는 사람,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고 성찰하며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어떻게 배울 것인가’」중에서
성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개념이다. 승자의 메달을 얻는 것보다 더 많은 부를 획득할 수 있는 더 큰 게임이 존재한다. 21세기에 승리란 무엇일까? 우리 모두 다시 정의해야 할 때다.
나는 내 생각을 다 믿지 않기로 했다
저자: <홍승주> 저
출판사: 다산북스
우리, 생각과 거리 두기로 해요
3만여 명이 선택한 심리치료 앱, 디스턴싱의 첫 책. 근본적으로 끊어낼 수 없는 부정적인 생각을 '거리 두기'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다. 심리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20가지 훈련법은 과도한 생각을 다스리고, 스스로의 마음을 돌볼 수 있도록 돕는다.
BY 2025.3.25 오다은 PD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이가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의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의자에 앉아 한곳을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하는 이의 모습은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생각한다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이 믿음은 명백한 오류이다.
--- p.33, 「생각은 자동적이다」 중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대로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당신의 관심사는 생각의 내용이었다. 부정적인 생각이었다. 더 나은 생각이었다. 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생각을 지나치게 밀착해서 바라보며 그것들을 제압하려고 고군분투한다는 점이다. 한 걸음 떨어져서 생각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관점이 열린다. 생각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다.
--- pp.48-49, 「생각과 거리가 가까울 때 문제가 발생한다」 중에서
텅 빈 마음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생각을 멈추려고 애쓰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회피할수록 강해진다. 마음을 치유한다고 알려진 모든 방법은 고통을 제거하거나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생각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마음속 생각들에 보다 유연하게 대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행복이나 평온, 이완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매 순간을 그런 감정으로만 채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더 깊고 본질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pp.117-118, 「회피할수록 강해진다」 중에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갖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연습으로 그들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대신 감정과 더 편안하게 관계 맺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나의 마음속에 떠오른 심리적 사건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그것들을 담을 수 있는 더 큰 그릇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것들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경험할 수 있다. 꾸준한 연습을 통해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당신의 삶은 이미 크게 변화해 있을 것이다.
--- pp.184-185, 「감정은 하나의 심리적 사건이다」 중에서
우리가 내면의 심리적 사건, 특히 생각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건 실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신은 구토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으로 여기지 않는다. 구토는 몸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리는 이를 자신과 이질적이며 불쾌한 것으로 여긴다. 생각 또한 구토와 마찬가지로 떠올랐다가 배출되어 지나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각을 구토처럼 흘려보내지 못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하지만 ‘나’를 알아차리다 보면 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 pp.216-217, 「‘나’는 착각이다」 중에서
언젠가 몸이 무겁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 지금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음속에 팝콘처럼 떠오른다면, 오른손을 아주 높이 들어보자.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해보자. 생각과 별개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생각과 거리를 둔 나는 선택할 수 있다. 가치에서 시작해 밖에서부터 안으로. 이것이 행동 변화의 핵심이다.
--- pp.284-285, 「행동은 생각이 아니라 ‘나’가 하는 것이다」 중에서
분노나 좌절감이 ‘나’를 흔들도록 내버려두지는 말자. 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지 말자. 생각과 감정은 ‘나’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치로 나아가기로 선택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다음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삶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며, 적어도 ‘방향’에 있어서는 실패란 없다. 사소해 보일지라도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우직하게 나의 가치를 향해 기꺼이 나아가자.
에디터의 기록법
저자: <김지원> 등저
출판사: 휴머니스트
이 시대에 ‘잘’ 기록하는 법
수많은 정보가 생성되며 휘발되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할까? 날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에디터 10인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뉴닉, 폴인, 캐릿 등 자신의 관점으로 유의미한 콘텐츠를 재생산하는 이들의 일상 철학부터 업무 노하우까지, 이 시대의 기록에 관한 다양한 인사이트를 전한다.
BY 2025.3.25 이주은 PD
나는 결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계속 쓰고, 혼자 헤매기 위해 기록한다. 그리고 대외적인 결과물은 이 기록과 메모 더미 중 일부를 꺼내 이리저리 궁리해서 붙이고 자르고 재가공한 것일 뿐이다.
--- p.15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공짜로 포식할 수 있는 오늘날, 우리의 설익은 욕망이 뭉쳐진 검은 덩어리는 언제까지고 우리에게 죄책감 덩어리로 남을 뿐이다. 큰맘 먹고 수많은 북마크, 저장된 기사 가운데 의무감으로 어떤 것을 실제 보고 난 뒤 어떻게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는 것 역시 저장 강박의 연장선상이다. 그리고 이는 기록 전문가들의 기록법, 생각 정리법 등의 강의가 비싼 값에 팔리는 세태를 둘러싼 풍경이다. 하지만 한 번쯤 질문을 던져볼 필요는 있다.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 p.23
나는 에디터라는 직업을 무척 좋아한다. 일상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재미있는 것을 찾아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일.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냉소하는 대신 기어코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 내가 하는 일이 그런 것이어서 좋다.
--- p.33
이야깃거리가 되겠다 싶으면 득달같이 채집해서 기록 주머니에 넣는다. 에디터에겐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웃거린다. 그 반대인가? 아무튼.
--- p.33
무엇을 기록하는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어디에 기록하느냐다. 재료를 신선하게 보관하고, 필요할 때 신속하게 꺼내 쓰는 것도 능력이니까. 일단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기록을 많이 하는 사람이지 체계적으로 하는 타입은 아니다. (…) 너무 완벽한 규칙과 체계를 세워놨을 때 오히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험을 자주 했다.
--- p.37
잊혔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 우리 뇌에 저장된다는 걸 연차가 쌓이며 깨달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이데이션을 하면 놀랍게도 뇌는 잊힌 줄 알았던 정보를 불러낸다. 그리고 무의식의 영역에 가라앉은 정보도 장기적으로는 나의 관점을 형성하는 기반이 됐다. 게으른 기록자로서 나는 확신한다. 본 것은 달아나지 않는다.
--- p.58
에디터로서 남들이 다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신선하고 널리 회자되는 기획을 하려면? 우선 내가 보는 정보의 양이 많아야 한다. 그래서 기록보다 중요한 건 무언가를 꾸준히 보는 습관이다. 인풋이 습관화되면 기획할 때 두 가지 레이더가 작동한다. 과거부터 누적된 정보에서 바로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도 있고, 일상에서 숨 쉬듯 접한 콘텐츠에서 지금 필요한 아이템이나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 p.61
에디터는 관찰하고 발견하는 사람이다. 매일 시시각각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 속에서 맥락을 발견하고 의미를 골라내 개별적인 정보를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사람이다. (…) 누구보다 눈 밝은 관찰자가 되어야 하고, 성실한 기록자가 되어야 한다.
--- p.84
나의 기록 습관은 상당히 단순하다. 체계적으로 정보를 저장하지도 않고, 전문적인 노트 앱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기본이 되는 도구는 총 네 가지인데, 앞서 소개했던 모바일 사파리 브라우저의 아이클라우드 탭, 맥과 아이폰의 ‘메모’ 앱, 싱스 앱, 그리고 종이 노트다.
--- p.108
대단한 깨달음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혼란스러웠다’라는 문자로 써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분명한 건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 p.121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 기록도 많지만, 나는 수많은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 스스로 답을 얻고, 글 속에 좀 더 완만한 길을 내며 독자에게 쉽게 읽히는 글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다보면 메아리로 흩어진 줄 알았던 목소리는 언젠가 선명한 귓속말로 돌아온다.
--- p.128
아이폰 메모장의 메모는 어느새 1400개를 향해간다. 매일이 마감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패션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시의성이 중요한 콘텐츠를 만들려면 곧바로 기록하고 필요할 때 바로 찾아 쓸 수 있는 기록 도구는 필수다. 패션은 트렌드뿐만 아니라 계절과 환경, 각종 이슈에도 영향을 받는다.
--- pp.143-144
당장은 파편처럼 보여도 바로바로 쌓아두는 기록이면 충분하다. 때로는 촌각을 다투며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패션 에디터의 일, 종종 책상 앞에 각 잡고 앉으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마는 내게 파편은 모여 든든한 ‘믿는 구석’이 된다.
--- p.148
앞으로는 콘텐츠를 그저 소비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좋은 콘텐츠를 자기 언어로 정리하고, 기록하고, 궁극적으로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자양분으로 축적하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과정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해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콘텐츠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이야말로 콘텐츠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본자세일 수 있다.
--- p.164
내가 못하는 건 기록보다는 정리에 가깝다. 나는 정리를 잘 못하는 대신 무조건 많이 찾아보고 흡수하고 쌓아둔다. 뭐든지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내 것이 되도록 모으는 버릇이 있다. (…) 잔뜩 쌓아둔 물건 중에 필요한 것을 바로 찾아내기도 어렵다. 하지만 ‘잘 쌓아’두지 않았다고 무엇도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재쓰비의 노래 가사처럼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것도 없”다.
--- p.186
마감에 돌입하면 우리는 진심으로 전력 질주한다. 과거에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던 ‘좋아하는 것’들의 기록을 찾아가면서 온갖 능력치를 풀가동하는 것이다.
--- p.198
일상의 초점을 원거리와 근거리로 바꾸다보면 새로운 글감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내 눈앞에 계속 있던 것도 관심이 없어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주 만나지만 늘 그냥 지나쳐서 몰랐던 어떤 단어, 누군가의 지나가는 말, 아이와 함께 놀았던 경험 등 그 현상의 이면에 무엇이 있을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내 생각은 어떤지 곱씹다보면 그 생각과 입장을 글로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된다.
--- p.216
J. K. 롤링과 크리스토퍼 놀런의 메모에서 또 하나 눈여겨본 것은 둘 다 ‘손으로 직접 썼다’는 사실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키보드보다 손으로 글을 쓰는 걸 권한다. 한글 키보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입력 방향이 정해져 있어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따라잡으며 두서없이 적기에는 손이 낫다. 처음에 PC나 노트북으로 쓰기 시작했더라도 중간에 이를 종이로 출력해 소리 내 읽고 그 위에 다시 손으로 쓰거나 노트에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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